대한민국 배드민턴의 중흥을 이끌어 온 큰 별 故 김학석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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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故 김학석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 대한배드민턴협회

배드민턴계의 거목(巨木) 故 김학석

대한민국 배드민턴의 거목인 김학석 전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이 지난 3월 4일 향년 7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대한민국 배드민턴이 어렵던 1970년대부터 배드민턴 발전을 위해 사비를 털어가며 노력해 대한민국을 배드민턴 강국으로 이끌었다. 선수 출신이지만 행정가로 배드민턴에 평생을 바쳐왔다. 2016년 체육단체 통합으로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에서 물러나 한국실업배드민턴연맹 회장을 역임했고, 2020년에는 대한배드민턴협회장에 출마하려다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며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고인이 그렇게 사랑하는 배드민턴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배드민턴계에서는 한국 배드민턴을 위해 헌신한 사람을 꼽으라면 제일 먼저 고 김학석 부회장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평생을 배드민턴을 위해 금전적으로나 행동으로나 아낌없이 쏟아부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올림픽 결승을 앞두고 긴박한 수술을 미루려 할 정도로 배드민턴에 애정을 쏟은 진정한 배드민턴계의 거목(巨木)이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故 김학석 부회장은 1974년 대한배드민턴협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부닥치자 아버지를 설득해 부회장에 앉히고 협회를 위해 돈을 쓰게 했으며, 자신은 대대로 내려온 양조장을 팔아 대표팀 경비로 쓰기도 했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나갈 돈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를 때 아낌없이 자신의 지갑을 연 게 故 김학석 부회장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 배드민턴은 김학석 부자가 키웠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 19종목이 출전해 메달을 골고루 획득했는데 유일하게 배드민턴만 노메달이었던 시절에도 故 김학석 부회장은 당시 최강이었던 일본 관계자들에게 한일 정기전을 제의했다가 망신을 당하고 10년만 기다리면 꺾어주겠다고 공헌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전국을 돌아다니며 배드민턴 꿈나무를 발굴했고, 마침내 1981년 3월 29일 황선애 선수가 전영오픈 배드민턴 여자단식 우승을 차지하며 전국적으로 배드민턴 붐을 일으켰다. 이에 비해 남자 선수들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해 국제대회에 출전조차 시키지 않으려던 시기였는데 김학석 부회장이 사비를 털어 1982년 이은구-박주봉 조를 내보내 덴마크오픈에서 남자 선수로는 국제대회에서 첫 메달인 금메달을, 전영오픈에서 동메달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故 김학석 부회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황선애의 선전으로 이제 겨우 국제대회에 이름을 내밀 정도였는데 1982년 일본 용품업체 요넥스와 8만 달러 후원이라는 파격적인 계약을 성사시켰다. 대표팀의 안정적인 훈련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이는 훗날 배드민턴이 올림픽 효자종목으로 불리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배드민턴 최강국에 올라선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은 2009년에는 대만 브랜드 빅터와 4년 동안 220만 달러 계약을 맺으면서 대한배드민턴협회를 부자 협회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2019년 국세청 기부후원금 결산서류를 기준으로 총자산 규모에서 대한배드민턴협회는 축구와 핸드볼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사진 故 김학석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 대한배드민턴협회

故 김학석 부회장은 50년 가까이 사업, 가정, 인생 모든 걸 배드민턴에 바친 말 그대로 배드민턴에 미쳐 살았다. 2000년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에 실려 가서도 우리 선수들의 올림픽 결승 경기를 보고 수술하자고 할 정도로 그의 배드민턴을 향한 열정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故 김학석 부회장은 마지막까지도 배드민턴을 향한 열정을 불태웠다. 2016년 한국실업배드민턴연맹 회장에 취임하고 연맹을 사단법인으로 만들었다. 실업연맹의 사단법인화는 올해 초에 열린 배드민턴 프로화의 첫 출발이라 할 수 있는 2022 코리아리그의 출범에 기여했다. 배드민턴 프로화의 초석을 다진 셈이다. 마지막까지도 배드민턴 발전을 위해 길을 열어준 진정한 배드민턴인이 바로 故 김학석 전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이니 어찌 거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 넘어 세계배드민턴 발전에 이바지

故 김학석 부회장은 1961년 성동중학교에서 배드민턴 라켓을 처음 잡았다. 당시만 해도 배드민턴은 열악했다. 우리나라는 대한배드민턴협회가 1957년에야 창립됐으며, 1962년에 대한체육회 가맹 경기단체가 됐다. 1962년 자카르타아시안게임에 선수까지 선발했지만, 파견을 취소했고, 1966년 방콕아시안게임 때는 남녀 각각 2명씩만 참가해 단체전에서는 단장과 임원이 선수로 등록해 뛰기도 했다. 

이렇게 열악했던 1960년대에는 선수들이 주말에 공원이나 약수터를 돌며 직접 배드민턴 보급에 앞장섰다. 이런 열악한 시기에 김 부회장이 배드민턴과 연을 맺은 것이다. 故 김학석 부회장은 1973년과 1974년 국가대표 남자팀 코치를 맡았다. 당시에는 태릉선수촌에 들어가도 배드민턴은 훈련 장소가 없어 밤에 복싱장에서 몰래 하다 쫓겨나기도 했다. 그야말로 배드민턴은 존재 자체가 유명무실했다. 

故 김학석 부회장은 1974년 대한배드민턴협회 경기이사로 참여하면서 행정가로 변신한다. 1982년까지 경기이사를 역임하고 1983년부터 1992년까지 대한배드민턴협회 전무이사로 선임돼 협회의 살림을 도맡았다. 1995년부터 대한배드민턴협회 전무이사 겸 부회장, 2016~2020년 한국실업배드민턴연맹 회장을 역임했고, 국제적으로도 1993~2002년에는 국제배드민턴연맹(현 세계배드민턴연맹) 이사, 1993~2015년까지 아시아배드민턴연맹 경기위원장과 재무위원장,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2005년에는 세계 배드민턴 발전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제배드민턴연맹(현 BWF)이 수여하는 ‘세계 배드민턴 우수 공로상(Distinguished Service Award)’을 받았다.

사진 故 김학석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 대한배드민턴협회

배드민턴계의 대부(代父) 故 김학석

공(功)이 있으면 과(過)가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배드민턴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고 하지만 부회장에게도 명과 암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체육단체의 오랜 고질병 중 하나가 바로 파벌이다. 배드민턴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국가대표 선발이나 국가대표 감독 선임을 앞두고 종종 이 파벌이란 단어가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그런 파벌을 다독이고 정리하는 것도 故 김학석 부회장의 몫이었다. 그 때문에 故 김학석 부회장은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배드민턴계의 대부(代父)로 불렸다.

故 김학석 부회장은 사실 전면에 나서지 않는 스타일이다. 오랜 세월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도 회장을 맡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회장을 하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부회장에 만족했다. 하지만 협회의 모든 결정은 김 부회장이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도 협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부가 故 김학석 부회장이었다.

일례로 지난 2009년 1월 6년 동안 대한배드민턴협회 수장을 맡았던 강영중 회장이 전격 사퇴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당시에 故 김학석 부회장과 다툼 때문이었다. 강영중 회장은 1997년 대교눈높이 배드민턴팀을 창단했고, 2003년에 대한배드민턴협회 회장에 이어 10월에는 아시아배드민턴연맹 회장, 2005년에는 세계배드민턴연맹 회장까지 맡았다. 강 회장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세계배드민턴계에서 막강한 인맥을 자랑하는 故 김학석 부회장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2007년 강 회장이 BWF의 펀치 구날란 부회장과 파워게임을 벌이는 과정에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故 김학석 부회장과도 틀어진다. 강 회장이 펀치 구날란 부회장을 축출했지만, 국내에서는 협회 운영을 둘러싸고 故 김학석 부회장과 잦은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이사회에서 중앙대의원 선출 방안을 놓고 표 대결을 벌이게 됐고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강 회장이 물러나게 됐다. 하지만 강 회장은 故 김학석 부회장의 일선 퇴진을 요구한 끝에 동반 사퇴로 이어지게 됐다. 사실 이사회는 회장에 우호적인 인사들로 구성되는데 이 표 대결은 故 김학석 부회장이 실권자임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故 김학석 부회장은 곧 협회 부회장에 복귀하지만, 이번에는 2016년 체육단체 통합 정관의 임원 연임 규정 때문에 다시 대한배드민턴협회의 임원직을 내려놓게 된다. 부랴부랴 한국실업배드민턴연맹회장에 취임한 故 김학석 부회장은 故 박기현 대한배드민턴협회장과 신경전을 벌이며 한국실업연맹의 사단법인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대한배드민턴협회장에 출마하려 했지만, 2020년 쓰러져 입원하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故 김학석 부회장을 대신해 선거에 출마했다고 밝힌 김택규 후보가 당선되면서 다시 한번 그의 파워를 실감케 했다.

故 김학석 부회장은 어찌 보면 배드민턴에서는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다. 초창기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故 김학석 부회장이 배드민턴을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대부로 불리며 오랫동안 전권을 쥐고 흔들면서 배드민턴계에도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드러냈다.

이제는 공도 과도 모두 내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간 故 김학석 부회장. 故 김학석 부회장의 유산이 대한민국을 배드민턴 강국으로 이끌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배드민턴을 프로화하기 위해 오랫동안 공들여 온 그의 유지를 받들어 배드민턴인 모두가 힘을 모아 프로화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지난 2021년 1월에 있었던 대한배드민턴협회장 선거의 골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故 김학석 부회장의 별세를 계기로 화합하고 단결하여 배드민턴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故 김학석 프로필]
생년월일 : 1949년 11월 1일
학력 : 성동중-삼성고-중앙대
주요 경력 : 1973∼1974년 남자 대표팀 코치, 1974∼1982년 대한배드민턴협회 경기이사, 1983∼1992년 협회 전무이사, 1995년∼2008 협회 부회장 겸 전무이사 1993∼2002년 국제배드민턴연맹 이사, 1996∼2010년 아시아배드민턴연맹 재무위원장, 2011∼2015년 아시아배드민턴연맹 부회장, 2016~2020년 한국실업배드민턴연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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