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배드민턴을 위해 삶을 송두리째 헌신한 진광고등학교 손문배 교장
강원도 배드민턴을 위해 삶을 송두리째 헌신한 진광고등학교 손문배 교장
  • 김용필 기자
  • 승인 2020.07.27 1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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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 교사로 시작해 교장 자리에 오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진광고등학교 손문배 교장은 그걸 해냈다. 오로지 배드민턴만을 위해 열심히 살아오다 보니 교장까지 맡게 됐다. 그 사이 그가 맡았던 진광중·고등학교는 전국 최고의 배드민턴부로 성장했다. 배드민턴 선수 출신으로 교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손문배 교장을 만났다.
사진 손문배 진광고등학교 교장, 배드민턴 뉴스DB
사진 손문배 진광고등학교 교장, 배드민턴 뉴스DB

특별 활동으로 출발해 교장의 자리에 오르다

진광중·고등학교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하나 있다. 특히 배드민턴 관계자들에게는 독보적인 인물이다. 바로 손문배 진광고등학교 교장이다. 열악한 강원도 배드민턴의 부흥을 위해 학교 체육복을 입고 대회에 출전하는 수모까지 참아내 마침내 진광중학교와 진광고등학교를 전국 최고의 배드민턴 학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선수 시절 화려했던 경력에도 불구하고 척박하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강원도 배드민턴 부흥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많은 시련과 고초에도 포기하지 않는 정신으로 오늘의 성과를 일궈냈다. 배드민턴 하나만 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온 그의 뚝심과 교육자적 자질은 체육 교사를 교장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은 밑거름이 되었다.

Q. 교장은 언제 되신 건가요?

"2013년부터 교감 3년 연수하고 2016년 8월에 교육이 끝나서 2017년 3월에 교장으로 부임했다."

Q. 평교사를 몇 년 동안 하신 건가요?

"1988년에 처음 진광중학교에 왔다. 33년 동안 진광에 있었고 2012년까지 평교사를 했으니 25년 동안 체육 교사를 했다."

Q. 교장이 되신 느낌은?

"그냥 운동했던 한 사람으로 정말 열심히 했다. 원래 다른 사람들은 교감이나 교장을 하려고 노력하는데 나는 운동부 아이들 가르치는 데만 열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 측에서 교감을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해서 교육받았고, 교장까지 하게 됐다. 처음부터 교장을 한번 해봐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교사를 했던 게 아니어서 남다른 감회는 없다."

Q. 강원도 배드민턴 1호라고 하던데 언제부터 하신 건가요?

"관설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배드민턴을 시작했다. 원주에 배드민턴부가 없어서 충북 충일중학교로 갔고 충주공업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다. 주니어대표도 했었고, 국가대표도 잠깐 했다. 한국체육대학교를 졸업하고 춘천시청 코치 겸 감독을 했다. 그런데 이 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춘천교육대학교 코치를 1년 했고, 교육청 파견 지도자로 학성중학교와 원주초등학교에서 1년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막 창당한 김천시청 선수로 뛰었다. 그러다 1998년 서울 올림픽 때 진광중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Q. 부임해서 배드민턴부를 창단하신 건가요?

"처음에 이 학교 배드민턴부가 없었고 원주에 배드민턴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강원도가 전국 최하위인데 내가 강원도 출신이고 이 학교에 발령하면서 배드민턴부를 창단하라고 해서 처음에는 특별활동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수업도 해야 하고, 배드민턴 배자도 모르는 아이들 가르치고 훈련하느라 처음에는 고생 많이 했다. 그렇게 특별활동으로 시작해서 강원도 대표가 됐고 그러면서 전국대회 입상도 하고 그렇게 성장했다. 1988년에 특별활동으로 시작해 1989년에 진광중학교 먼저 창단하고, 그 아이들이 졸업한 1991년에 진광고등학교가 창단됐다."

Q. 초창기에는 유니폼이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던데

"운동부라기보다는 특별활동이니 그때 얘기하면 마음이 아프다. 전국대회 가면 여러 가지 브랜드를 입고 오는데 우리는 학교 체육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1년 예산이 40만 원 정도였다. 운동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배드민턴 전공자였기에 그래도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40만 원이면 라켓 한 자루씩 사고 나면 아무것도 살 수 없는 그런 상황이니까 선생님들이 지원해주고, 운동부 돕기로 아이들에게 빵도 지원해주고 그래서 할 수 있었다. 내가 배드민턴 전공자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원도가 너무 약해서 한 번쯤은 해봐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끌어왔다. 이 이유로 버텨왔던 거 같다."

Q. 진광의 스타일은 체력전인데 이유가 있나?

"1978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종합선수권대회 1등을 해서 크게 화제가 됐었다. 고등학교 때 1학년부터 3학년 때까지 복식은 계속 우승을 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어디선가 구멍이 생긴다. 내 전략은 그거다. 그래서 체력적으로라도 세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든다. 결국 체력은 기본이다. 그래서 기본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진광 선수들에게도 체력 훈련을 많이 시켰다. 또 셔틀콕 많이 들어가니 운동을 많이 할 수 없어 체력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1시간이면 끝날 게임이 진광 애들하고 하면 2, 3시간씩 갔다. 그만큼 우리 애들이 체력이 좋고 끈기가 있었다. 그래서 좋은 성적을 내지 않았나 생각한다."

사진 손문배 진광고등학교 교장, 배드민턴 뉴스DB
사진 손문배 진광고등학교 교장, 배드민턴 뉴스DB

Q. 감독이 배드민턴 선수 출신이라 선수들에게는 좋았을 거 같은데

"일단 아이들 장단점을 빨리 파악한다. 내가 복식을 잘해서 보면 딱 보면 얜 되겠다, 얜 안 되겠다 이게 보인다. 그러니 선수들이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모처럼 체육관에 가면 애들이 놀고 있었는지 뛰고 있었는지 보면 아니까 애들도 지도자들도 거짓말을 못 한다. 좋은 점도 있었겠지만 나쁜 점도 있었을 것이다. 애들한테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줬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도 든다."

Q. 선수들에게 제일 강조한 게 뭐였나?

"안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안된다고 생각할 땐 돌아서면 주저앉게 된다. 나도 키가 작고 그래서 몇 십번, 몇 천 번은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들한테는 전국대회 가서 지더라도 나는 안 된다, 나는 아니라는 생각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강조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선수가 되면 좋겠다는 말을 정말 많이 했다. 그리고 국가대표나 올림픽 금메달 같은 목표를 정하는데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씩 하나씩 단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얘기도 많이 했다. 그게 기본이니까. 기본을 강조하다 보니 체력을 강조하게 됐다."

Q. 제일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처음 시작할 때 아이들 고생했던 게 제일 생각난다. 그때는 계획도, 예산도 없는 상태였다. 특별활동으로 시작해서 그 당시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엄청 따라 하고 같이 해준 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 물론 고성현처럼 세계적인 선수가 된 것도 기억이 나지만 그때 그 아이들이 밑거름을 만들어 준 거니까 1, 2회 아이들이 제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 아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진광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학교가 운동부를 만들고 그런 학교가 아니었다. 운동부 없는 학교로 유명한 학교가 우리 학교였다. 그런데 배드민턴이 생겼는데 그 역할을 잘해준 게 처음 시작한 그 아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고생 많이 했으니까."

손문배 교장은 올해 환갑이다. 배드민턴을 향한 심장이 따로 있나 싶을 정도로 여전히 배드민턴 가방을 메고 지나가는 동호인을 봐도 설렌다고 한다. 평생 배드민턴과 함께 한 삶 때문에 가족들에게는 미안함을 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다행히 진광 배드민턴을 시작했고, 외부에서 부러워할 정도의 진광 배드민턴 시스템을 만들어 진광 배드민턴의 체계를 갖춰놓았다. 호구로 불렸던 강원도 배드민턴을 마주치기 싫어하는 팀으로 만들어 놓은 강원도 배드민턴의 힘 그 중심에 손문배 교장이 있다. 여전히 배드민턴 활성화를 위해 전교생에게 배드민턴 보급을 시도하는 등 그의 노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Q. 생활체육 활성화에도 일조하셨다고 하던데

"70년대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체육관이 없었을 때니까 원주에 생활체육으로 배드민턴 하던 사람이 10여 명이나 됐을 것이다. 그때는 외제를 못 쓰게 했던 시기다. 일제를 쓰고 싶어도 선수들은 못 쓰고 일반 사람들만 썼다. 그렇다고 그때 사람들이 일제 살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고 공원에서 배드민턴 하던 수준이었다. 그러다 80년대에 새마을본부에서 배드민턴을 권장하면서 배드민턴 동호인이 늘었지만 지금처럼 몇 천 명이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체육관이 없으니까 잘 안 되는 거 같아서 내가 진광중학교 감독이니까 새벽에 체육관을 개방했다. 밤에도 열어달라고 해서 야간에도 체육관을 개방하고 그러면서 생활체육 동호인도 많이 늘었다.
학교에서도 배드민턴 활성화를 위해서 학생 전체에게 셔틀콕을 주고 아래에서부터 치면서 올라오게 했다. 마치 매스게임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일반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챔피언을 뽑고 그랬다. 1학년 1등은 누구, 2학년 1등은 누구라고 알려주더라. 선생님들도 배드민턴 하는 아이들에게 잘해준다. 교장이 배드민턴 전공자 출신이니까 신경을 더 쓰는 것 같다."

Q. 사모님도 배드민턴 선수 출신이라고 하던데

"아내는 전라북도 사람인데 춘천시청에서 선수로 뛰었고 내가 코치 겸 감독으로 부임했다. 팀이 해체되고 나서 교제를 시작했다. 선수 생활하면서 내 눈에 들었으니까 팀이 해체되고 만나지 않았겠나."

사진 손문배 진광고등학교 교장, 배드민턴 뉴스DB
사진 손문배 진광고등학교 교장, 배드민턴 뉴스DB

Q. 아이들 배드민턴 시킬 생각은 없었나?

"아이들도 배드민턴 좋아했다. 내가 봐서는 여러 조건이 안 맞았다. 체격적인 조건도 아니었고 또 내가 감독인 상태에서 하려니까 이게 좀 그랬다. 그때 당시에 자기 새끼 운동시킨다고 하면 다른 부모들이 보기에 문제가 생길 거 같았다. 아마 이게 제일 큰 이유였을 거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내 새끼를 더 예뻐할 거 같아서 못하게 했다. 내 새끼 닭 다리 하나 더 먹여도 문제가 될 거고 보기에도 안 좋고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제일 큰 이유였다. 아이들이 운동에 재능이 없지만 있었다고 해도 안 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시켰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Q. 배드민턴만 해 왔는데 후회는 없나?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한 학기도 쉬지 못한 거 같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운동부를 가르치며 이렇게 왔으니까. 7, 8년쯤 감독을 하다 보니 배드민턴 안 하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방학 때마다 스트레스받았다. 여름, 겨울 훈련하느라 가족들하고 어디 놀러 못 가니까. 그러니 이거 좋아할 사람 누가 있겠나. 그러니까 10여 년 되니까 솔직히 그만두고 가족들이랑 놀러 다니고 그러고 싶을 때도 있었다. 강원도 배드민턴도 어느 정도 실력이 되고 하니까 나도 좀 느슨해졌던 거 같다. 결국 30년 넘게 그만두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

Q. 진광 선수들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아이들이 사회 나와서 배드민턴만 하면서 먹고 살 수 있기에는 한계가 있다. 운동하면서 공부도 하고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배드민턴부 아이들이 이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돼서 아 그래도 배드민턴 했던 사람은 뭔가 다르구나 이런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나는 정말 열심히 했다. 교장을 하려고 열심히 한 건 아닌데 한 분야에서 열심히 하다 보니 좋은 일이 있더라. 일반 사회에 나와서도 멋진 선수로 활약하면 좋겠고, 특히 올림픽에서 진광 출신이 메달 따는 걸 보고 싶다. 고성현 선수가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지만, 올림픽 메달을 따지 못해 아쉬웠다. 꼭 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선수가 나오면 좋겠다."

Q. 앞으로 계획은?

"올해 환갑이다. 배드민턴만 하고 살았는데 좀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이제 나이 먹어서 슬슬 아프다. 나도 그렇고 가족들도 건강했으면 좋겠다.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 기사는 배드민턴 매거진 2020년 7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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